조선 성생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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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19세기 초 천주교를 포교한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이렇게 썼다. “풍기의 문란은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과반수가 그들의 진짜 부모를 모르고 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또 다른 프랑스인 신부 리델 역시 그 악독한 조선의 감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로 음담패설을 꼽았다. 19세기 조선은 조선조를 통틀어서 유교적 교리가 가장 확실히 정착된 시기라던데…. 

<북상기>는 이런 19세기의 조선 희곡이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하지만, <북상기>는 과연 이 희곡으로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적나라하다. “선생은 순옥(기생)의 발을 당겨 바지를 벗기고, 손으로 옥경을 쥐고 약물에 발라 옥지의 양 가장자리에 바른다. 한 점 한 점 바르자 어느덧 귀두가 솟아올라 옥지 안으로 반쯤 빠지니 앞길만 있고 물러날 길이 없다”는 지문을 과연 연기할 수 있을까? 옥경은 남자의, 옥지는 여자의 성기를 뜻한다. “조선시대에 성을 이렇게 공공연히 말하는 건 금기였습니다. 사대부들은 여성이나 연애를 문학의 소재로 다루는 걸 꺼려했거든요. 물론 19세기 이전까지 표현의 자유가 없었다 뿐이지, 조선 사회가 근엄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북상기>의 역자 안대회 교수가 말했다. 즉,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던 성문화를 과장해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이후 <금병매> 등의 중국 소설이 읽히며 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얻은 상황에서 현실의 섹스가 자연스레 문학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북상기>는 섹스 신은 물론이고, 섹스를 위한 준비 과정 또한 ‘디테일’이 확실하다. 일단 성인용품이나 섹스 보조제로 쓰이는 도구들이 눈에 띈다. 체면과 절차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이다 보니, 섹스할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했던 모양이다. “구리 주전자에 한연초(물레나물) 온탕을 미리 붓고 여정실(광나무 열매) 고운 가루를 조금 타서 빈모를 함께 씻고, 이어서 따뜻한 오매탕 한 종지와 팔실당 가루 조금으로 빈을 씻는다. 작은 금합 안에 한수향 자연유가 있으니 반 푼을 달걀흰자위 한 수저에 타서 옥지 안 양쪽 벽에 발라서 간삽(뻑뻑함)을 조절하고, 금림 안에 빨간 가루와 흰 가루가 있으니 빨간 것은 닭벼슬에 발라 온산을 돕고, 흰 것은 침에 묻혀 그 얄미운 귀두에 발라 부푸는 것을 도와준다.” 마치 한복을 순서대로 입는 것처럼 고매하고 복잡하게 들리지만, 사실상 이 모든 것은 남녀가 섹스를 원활하게 즐기기 위한 도구들이다.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러브젤’이나 발기약의 기능을 한달까? 

한편 위 본문에서 알 수 있듯, 섹스와 관련된 어휘 중엔 유독 한자어가 많다. 다른 문단에서 방중술의 기술로 언급되는 ‘입육쌍겸’, ‘투심일협’ 같은 표현은 무협지에 나오는 초식의 이름을 방불케 한다. 이런 특징은 자지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보다 페니스가 좀 덜 민망하고, 오랄 섹스란 표현은 대체할 우리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지금과도 꽤 닮아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엔 섹스 토이의 역할을 하는 물건도 존재했다. 면령이라는 도구인데, 일종의 바이브레이터 역할을 한 듯하다. 19세기 학자인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빠지지 않았다. 이 책에는 면령을 두고 중국 명나라의 사조제가 쓴 <오잡조>를 인용해 “열기를 받으면 절로 움직여 그치지 않는다. 면전(지금의 미얀마)의 남자는 음경에 박아 넣어 방중술을 돕는다”고 쓰여 있다. 실학자 유득공 역시 <난양록>에서 “내가 원명원(청나라의 황실 정원)에 있을 때 남장국(지금의 라오스) 사자가 자기들 통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한 가지 물건을 팔려고 하였다. (중략) 그 쓰임새를 물으니 매우 더럽다”고 밝혔다. <북상기>엔 “백자면전환이 있으니 일을 치를 때 음양에 각각 두 알을 넣으면”이란 구절이 있는데,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같은 용도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자는 잣, 면전환은 면령을 뜻한다. 즉, 백자면전환을 조선의 자연산 혹은 유기농 섹스 토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이렇게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 단순할 리가 없다. 조선시대엔 다양한 체위가 방중술이란 울타리 안에서 행해졌다. 사실 방중술은 알려진 것과 달리 정력을 좋게 하는 방법이나 섹스하는 요령이 아니라, 건강 수행법이 가깝다. “성관계는 하되 사정은 하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등 건강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섹스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총론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방중술이 그저 건강만을 생각해서 고안, 발전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기방에서는 온갖 다양한 것이 다 가능했을 거예요. 물론 그런 방중술 기교를 기록해 남겼을 가능성은 굉장히 드뭅니다.” 안대회 교수는 조선시대에 기생의 종류가 무척 많았으며, 조선의 성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상기>에 등장하는 마파, 품소, 그네타기, 원앙 다리 희롱하기, 협비선, 후정화 등의 방중술 기교가 정확히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는 기록이 희박해 알기 어렵지만, 몇몇은 뜻풀이만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그중 후정화는 애널 섹스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애널 섹스는 어쩌면 지금보다 조선에서 더 성행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의 음담패설집 <기이재상담>과 <유년공부>를 번역한 <조선의 음담패설>에는 애널 섹스에 대한 얘기가 빈번하게 나온다. 그렇지만 심각하기보다, 일상적이라는 인상이다. “내 밤마다 당신 앞구멍을 닦는데, 어찌 다시 상놈에게 뒷구멍까지 닦아달라 하는가!”, “앞구멍은 이미 임자가 있으니 허락할 수가 없고, 뒷구멍은 정한 주인이 없으니 허락하지요” 같은 식이다. 조선 춘화에도 애널 섹스의 흔적이 있다. 여자의 성기는 드러나는데 남자의 성기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 간혹 있는데,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안은 채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섹스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일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에선 애널 섹스보다 더 파격적인 일들도 종종 벌어졌던 것 같다. <조선의 음담패설>엔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도 더러 있다. “처제, 이제 시집가면 부부가 합궁을 해. 합궁에는 방법이 있지. 합궁은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이 아프니, 미리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고통을 면할 수 없어. 내가 방법을 가르쳐줄게”라며 처제를 구슬리는 형부의 이야기를 비롯해, 사돈지간이 집을 잘못 찾아가 서로의 아내와 섹스를 했다는 내용 등이다. 두 이야기 모두 결론은 긍정적이다. 분노하기보다, “결국은 피차일반”이란 식의 결론을 내린다. 지금의 윤리를 적용하면 아주 악질이라 할 수 있는 불륜을 표현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임신한 처녀에게 지금 임신한 아이에게 귀나 다리가 없으니 자신과 섹스를 해야 온전한 아이가 태어난다고 꾀어내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의 이야기에서도,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남자를 용서한다.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근친상간으로 사형을 당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있긴 했죠. 일단 조선에서 성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우스개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안대회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즉, 조선의 성은 겉으론 쉬쉬하는 대신, 속으론 웃기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북상기>와 <조선의 음담패설>엔 공통적으로 치료를 빌미로 한 섹스가 등장한다. <북상기>에선 남자의 성기에 약을 발라 여자의 성기 안에 난 상처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얼토당토않지만, 그 발상이 기발하고 귀엽다. <조선의 음담패설>엔 학질을 떼기 위해 남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학질을 치료하는 데 환자의 열을 끓어오르게 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방중술을 비롯해, 섹스가 의학에 밀접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섹스에 대한 접근이 떳떳하고 자연스러웠던 걸까? 조선시대엔 <논어>를 떼고 나면 ‘보정’이라는 과목의 성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의 섹스와 성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희곡을 비롯한 몇 안 되는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대부분은 한문으로 쓰여 있고,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층과 즐기는 층 모두가 양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유교적 규범은 양반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양반들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답답한 맘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책들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에 등장한 춘화 역시 비싼 가격 탓에 주로 양반들이 즐겼다. 춘화에서 드러나는 섹스는 꽤 노골적이다. 스리섬이나 중이 젊은 여자와 섹스를 하는 그림도 간혹 보인다. “조선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고 봐요. 10대 중반이면 결혼을 하니까 섹스가 일상적이죠. 이를테면 지금 포르노 촬영감독이 춘화 화가인 거예요. 정확히 안 보면 그렇게 못 그리죠. 보고 그려도 어려운 판인데.” 논문 <조선후기 춘화의 발달과 퇴조>, 저서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등을 낸 미술사학자 명지대 이태호 교수는 춘화를 상상의 산물로 여기지 않았다. “중국은 17세기, 일본은 18세기에 춘화가 크게 발전했어요. 크게 보면 근대를 준비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죠.” 조선의 춘화, 그리고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섹스를 조합해보면 조선의 성적 관대함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런 관대한 성정이 근대화가 서서히 시작되던 19세기 들어 비로소 글과 그림으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어디까지가 해학이고 어디까지가 진지한 부분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남아 있는 것들로부터 추측할 뿐. 과연 조선은 자유로운 섹스의 나라였던 걸까? 한복의 옷고름은 꽉 매는 게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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